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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상주의

    재정·군사 국가의 군주들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였다. 군주들은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상공 시민 계층을 지원하여 재정적 지원을 받고자 하였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시행된 일련의 정책을 ‘중상주의’라고 한다.

    중상주의 정책은 크게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1단계에서는 금을 획득하여 국가의 부를 증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이에 따라 여러 국가가 식민지 경영에 뛰어들었다. 2단계에서는 다른 나라가 가지고 있는 금을 차지하기 위해 수출은 증대하되, 수입을 억제하였다. 마지막으로 3단계는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국내 산업을 보호·육성하고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여하는 것이다.

  • 바로크 양식

    바로크의 어원은 ‘비뚤어진 진주’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이다. 그리스·로마의 고전적 건축 양식이나 예술을 최상으로 여긴 사람들이 바로크 양식을 낮게 평가하고자 붙인 말이다.

    바로크 양식이 유행하기 시작한 17세기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이 한창이었다. 교황은 종교 개혁에 대항하면서 구교도들의 종교적 감성을 고양하고자 예술 작품을 활용하였다. 대규모의 성당과 눈길을 끄는 예술 작품으로 구교도들의 신앙을 견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바로크 양식은 이후 프랑스 루이 14세가 건립한 베르사유 궁전에 영향을 미쳤다. 여러 지역으로 전해진 바로크 양식은 국가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이며 각기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 루이 14세

    루이 14세는 1643년부터 1715년까지 약 반세기 동안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짐은 곧 국가다.’라는 원칙을 내세운 루이 14세는 강력한 전제 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루이 14세는 왕권이 절대적임을 선언하고 콜베르를 재무 장관으로 등용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또한 플랑드르 전쟁, 네덜란드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에스파냐 계승 전쟁 등 연이어 전쟁을 강행하였다. 루이 14세의 절대적인 왕권을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은 이후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연이은 전쟁과 신교도를 박해하는 정책 등으로 프랑스는 점차 쇠퇴하였다.

  • 재정·군사 국가

    재정·군사 국가는 효율적으로 징세하고,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 중무장한 봉건 기병에서 화약 무기로 무장한 직업 보병으로의 이행은 재정·군사 국가의 출현을 주도하였다. 지배자들은 중앙 집권을 견고히 하고,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였고 다른 지방 세력들을 억제하였다.

    그러나 중앙 집권을 시도하는 국가에 대한 봉건 귀족과 도시 상공인 계층의 반발도 거세게 일어났다. 이 시기 유럽의 역사는 다른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자국의 지위를 끊임없이 지키고자 투쟁하는 역사인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권력의 독점을 꾀하는 국가와 이에 저항하는 사회 집단 간의 갈등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 종교 전쟁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잦은 종교 전쟁이 발생하였다. 특히 독일에서 시작된 30년 전쟁(1618~1648)은 여러 나라가 참전하면서 국제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은 신교를 믿는 지역을 가톨릭 제후의 통치 지역으로 포섭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신교 측은 프리드리히 5세를 중심으로 신교 연합을 구성하였다. 이후 1619년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가 황제가 되면서 신교를 탄압하자, 보헤미아 지역에서는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저항하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가톨릭 연맹과 에스파냐의 지원을 바탕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후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이 신교를 지원하고 에스파냐, 오스트리아 등이 구교를 지원하면서 전쟁은 장기화하였다. 이 전쟁으로 에스파냐의 동맹국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는 큰 타격을 받았고, 프랑스가 유럽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 포토시

    포토시는 아메리카의 해안 도시 아리카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의 높은 산 정상에는 약 400m 높이의 작은 구릉이 솟아 있는데, 1545년 이 구릉에서 엄청난 양의 은이 발견되었다. 이후 인근 지역에서 최소 7개의 은 광맥이 연달아 발견되면서 본격적으로 포토시 개발이 시작되었다.

    풍부한 은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무수한 사람과 가축, 설비들이 포토시에 모였다. 포토시가 건설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아 도시 주민의 수는 15만 명을 넘어섰고, 1610년경에는 16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포토시에서 채굴된 막대한 양의 은은 에스파냐에 의해 유럽의 여러 나라로 흘러 들어갔다.

  • 상업 혁명

    신항로 개척 이후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대서양 교역권이 성장하였다. 한편, 아프리카 남단을 통해 아시아와 교역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유럽의 경제는 더욱 성장하였다.

    방대한 양의 물자가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상업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였고, 유럽 경제의 중심도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서 대서양 연안의 국가들로 옮겨 갔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게 된 상업의 변화 양상을 통틀어 ‘상업 혁명’이라 일컫는다. 상업 혁명은 향후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노예 무역

    17세기 유럽이 주도한 노예 무역은 오랫동안 아프리카에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초래하였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을 잇는 삼각 무역과 미국 남부, 카리브해 연안, 브라질 등지의 대농장을 중심으로 노예제가 확립되었다.

    18세기 말에는 매년 6~7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의 노동력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강제로 이송되었다. 식민 시대 초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쿠바, 히스파니올라섬(현재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브라질 등지에 35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유입되었다. 유럽의 노예 상인들은 ‘책꽂이에 책을 꽂듯이’ 배에 노예를 한가득 싣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수천km를 항해하였다.

  • 에스파냐

    16세기경 세계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막대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던 펠리페 2세는 영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대규모 함대를 편성하였다. 1588년 펠리페 2세는 우세한 전력을 앞세워 영국으로 출항하였다. 이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수적으로 열세하였지만 에스파냐에 맞서기 위해 뛰어난 전투력을 갖춘 함대를 파견하였다. 플리머스 연해와 칼레 연해에서 영국 함대는 에스파냐의 함대에 큰 타격을 입히며 승리하였다. 그 결과 에스파냐는 영국에게 해상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항로 개척 이후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고추, 토마토, 담배, 카카오 등이 유럽과 아시아로 전해졌다. 반면에 소와 말, 커피와 사탕수수가 아메리카에 전해졌다. 이 시기 유럽에 전해진 감자는 유럽의 식량 해결 문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대량으로 재배할 수 있는 감자는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다가 점차 식량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한편, 설탕 수요가 급증하면서 브라질 지역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늘어났다. 유럽인들은 이익을 늘리기 위해 아프리카 노예를 사탕수수 재배에 적극 동원하였다.

  • 캐러벨선

    캐러벨선은 포르투갈인들이 이베리아반도 주변 해역에서 국지적인 무역에 사용하고자 처음 개발하였다고 전해진다. 홀수(배가 물에 잠기는 깊이)가 커서 많은 선원을 태워도 안정적으로 운항할 수 있었으며 조종도 편리하였다. 또한 장시간 바다에서 머물 수 있었고, 적절한 바람을 받으면 매우 빠른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캐러벨선은 신항로 개척 시기 대항해를 주도하였다. 콜럼버스가 1492년 첫 번째 항해에서 사용한 3척 중 2척의 배도 캐러벨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