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가는 것보다 인도에 빨리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에스파냐 여왕의 후원을 얻은 그는 1492년에 대서양을 가로질러 지금의 서인도 제도에 도착하였다. 이후 콜럼버스는 세 차례에 걸쳐 중남미 대륙에 도착하였고, 그곳을 인도라고 생각하였다. ‘아메리카’라는 명칭은 16세기 초 콜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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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레이만 1세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인 술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확대하고 전성기를 누린 왕이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20여 개의 민족과 5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술레이만 1세는 이라크를 공격하여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국경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동유럽의 베오그라드와 헝가리를 정복하였다. 이후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 연합 함대를 무찔러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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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칼리프 제도
오스만 제국의 제9대 술탄 셀림 1세는 술레이만 1세의 아버지이다. 셀림 1세는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 곧 이란의 북서부를 차지하고, 이집트를 공격해 시리아와 카이로로 진출하여 홍해를 세력권에 넣었다. 이 시기부터 약 400년간 시리아와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셀림 1세는 이집트가 가지고 있던 예언자 무함마드의 망토와 턱수염, 발자국, 활 등의 성물을 가져와 종교적 지배자인 ‘술탄’이자 이슬람의 최고 정치 지도자인 ‘칼리프’가 되었다. 1925년 칼리프 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세계의 종교와 정치를 대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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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하우스
커피의 본향은 아라비아 남부 예멘에 있는 모카 지방이다. 16세기 초 예멘의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잠을 쫓고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해 주는 커피의 효능이 이슬람 세계에 알려지면서 커피는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이후 메카의 순례객들에 의해 이집트, 시리아 등으로 전해졌고, 예멘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커피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발전과 함께 수도 이스탄불에는 수많은 카페가 생겨났다. 이스탄불에서 커피는 특권층이 마시는 최고의 음료였다. 유럽의 외교관들은 이스탄불에 왔다가 커피 애호가가 되어 돌아갔다.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스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렸다. 오스만 제국이 빈을 공격한 이후 빈에도 카페가 등장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유럽에도 커피가 알려졌다. 1683년경 런던에는 약 3천 개의 커피 하우스가 생겼다. 이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커피를 기호 식품으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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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아흐메트 사원
이스탄불에는 성 소피아 대성당과 술탄 아흐메트 사원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술탄 아흐메트 사원은 비잔티움 제국의 성 소피아 대성당의 위용을 뛰어넘고자 제14대 술탄인 아흐메트가 기획하여 지은 것으로, 1616년에 완공되었다.
모스크의 중심에는 지름이 20여m에 달하는 커다란 돔이 있고, 그 아래 작은 돔들이 층을 이루고 있다. 모스크의 양쪽에는 6개의 첨탑을 세웠다. 내부에는 260여 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배치되어 있고, 내벽은 2만여 개의 푸른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모스크 내부에 푸른빛이 감돈다고 하여 술탄 아흐메트 사원은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
바자르
오스만 제국이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상업이 크게 번성하였다. 바자르에서는 동서 교역로를 통해 들어온 여러 나라의 다양한 교역품들이 거래되었다.
바자르는 튀르키예어로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실내 시장으로 평가받는다. 술탄 메흐메트 2세의 명령으로 건설되었고, 술레이만 1세 때 대대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되었다. 바자르는 오스만 제국의 근거지였던 튀르키예 외에도 시리아, 이란 등지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스탄불에 위치한 카팔르 차르쉬 바자르는 출입문이 20여 개에 달하고 60여 개의 거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
메흐메트 2세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유럽으로 진출하였고, 지중해와 유럽으로 가는 교역로를 장악하였다. 1459년에는 세르비아를 공격하고, 이후 아나톨리아 북부의 트레비존드 제국을 멸망시켰다. 1517년에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1526년에는 헝가리의 군대를 무찔렀다. 1529년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을 포위하였고, 1571년에는 키프로스섬과 크레타섬을 차지하였다.
특히 메흐메트 2세가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사건은 오스만 제국이 크리스트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슬람의 세력을 확장시켰다는 의미를 지닌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유럽의 동쪽에서는 이슬람 세력을 막아 주는 방파제가 사라지게 되었다.
17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의 빈을 공격하다가 실패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정복 활동은 주춤하였다. 또한 서양 세력의 침입으로 국력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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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군사 국가
종교 개혁과 종교 전쟁
중세 말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며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보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벌부를 판매하자, 루터는 이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신앙과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그의 주장은 독일 전역으로 퍼져 지지를 얻었다. 마침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파가 공식으로 인정받았다(1555).
스위스에서는 칼뱅이 인간의 구원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하며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영국에서는 국왕 헨리 8세가 영국 국교회를 세워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종교 개혁이 확산하면서 가톨릭교회(구교)와 신교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어 유럽 각지에서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 독일에서 일어난 0년 전쟁은 주변 여러 나라가 참가하면서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맺어지면서 끝이 났고, 조약을 통해 칼뱅파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재정 군사 국가
중세 말 유럽에서 각 국가는 군사적 경쟁을 통해 주변 지역을 통합해 나가는 과정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후 16세기 유럽에서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효율적인 세금 제도와 중앙 행정 기구를 갖춘 재정・군사 국가가 등장하였다.
국가 간 경쟁이 17세기 종교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재정・군사 국가들은 군대 규모를 더욱 늘리고자 하였지만, 강력한 비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였다. 이에 세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수출을 장려하고 관세를 높여 수입을 줄이는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상공 시민 계층의 상공업 활동을 보호해 주는 대신 이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원료와 상품 시장을 얻기 위해 식민지 확보에 힘을 쏟았다.
영국에서는 국왕과 의회가 상호 협력하면서 재정・군사 국가가 안정적으로 성장하였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국왕이 왕권의 절대적인 힘을 과시하고 의회를 억누르면서 국가를 운영하였다.
영국 의회 정치
16세기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1세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찔러 해상권을 장악하고, 동인도 회사를 세워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트리와 상인, 제조업자 등 시민 계층이 성장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칼뱅의 교리를 따르는 청교도로서, 의회에도 진출하였다.
찰스 1세가 제 정치를 하며 의회를 무시하자 의회는 「권리 청원」을 제출하여 왕권을 제한하였다. 하지만 의회를 탄압하는 등 찰스 1세의 실정이 계속되자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는 내전에서 승리하여 왕을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청교도 혁명). 그러나 크롬웰이 독재 정치를 펼쳐 국민의 반감을 샀고, 그가 죽은 후 왕정이 부활하였다.
왕정복고 이후 제임스 2세는 의회를 무시하고 청교도를 탄압하였다. 의회는 제임스 2세를 물러나게 하고 그의 딸 메리와 남편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세웠다(명예혁명, 1688). 이듬해 의회는 「권리 장전」을 승인받았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영국은 헌 군주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국왕과 의회가 협력하는 영국 재정•군사 국가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겪으면서 영국에서는 국왕과 의회가 협력하는 체제가 자리 잡았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을 유지하기 위해 의회의 협력으로 군사비 지출을 늘렸다. 늘어난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은행을 세워 자금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국의 재정・군사 국가는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였다.
국왕이 주도한 프랑스의 재정・군사 국가
프랑스에서 권신수설을 철저히 믿으며 국왕의 절대적인 힘을 강조하였다. 그 가운데 재정・군사 국가를 확립한 국왕은 루이 14세였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재무 장관으로 등용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고,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였다. 스스로를 ‘태양왕’으로 칭하였으며,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자신의 막강한 권력과 부를 드러내었다.
이 과정에서 루이 14세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세금을 늘렸다.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세력을 넓히고 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무리한 대외 전쟁을 자주 벌이면서 국가 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또한 루이 14세가 신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자 상공업 분야에서 활약하던 신교도(위그노)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산업도 위축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전경과 루이 14세
루이 14세는 위대한 국가 건설을 자신의 최대 목표로 삼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넓히고자 하였다. 그는 이전에 1만 5천 명에 불과하던 상비군을 65만 명까지 늘렸다. 군사비도 크게 늘려 군사비가 국가 재정의 75% 이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루이 14세는 전쟁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였나요?
루이 14세는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늘리고, 농민으로부터 과도하게 세금을 걷어 비용을 확보하였다. 각 지방이 크게 저항하지 않은 이유는 루이 14세가 봉건 귀족의 특권과 이익을 보장하면서 이들과 타협하였기 때문이다.
루이 14세는 위대한 국가 건설을 자신의 최대 목표로 삼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넓히고자 하였다. 그는 이전에 1만 5천 명에 불과하던 상비군을 65만 명까지 늘렸다. 군사비도 크게 늘려 군사비가 국가 재정의 75% 이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왕권신수설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사상을 말한다.
권리 장전
「권리 장전」의 승인으로 국왕의 권력은 의회에서 제정한 법의 제한을 받으며, 국왕이 의회의 동의를 거쳐 통치해야 한다는 입헌주의의 전통이 마련되었다. 이는 미국의 「독립 선언문」, 프랑스의 「인권 선언」에도 영향을 끼쳤다.
권리 장전 내용
제1조 국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법의 효력을 정지하거나 법의 집행을 정지하는 것은 위법이다.
제4조 의회의 승인 없이 국왕을 위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행위는 위법이다.
제6조 의회의 동의 없이 평상시에 상비군을 징집하고 유지하는 것은 위법이다.30년 전쟁(1618~1648)
스웨덴, 프랑스 등이 신교를 지원하고, 에스파냐가 가톨릭교회(구교)를 지원하는 등 여러 국가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참가하였다. 전쟁으로 독일 지역에서 인구 약 3분의 1이 감소하였다.
95개조 반박문
상비군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군대를 말한다. 당시 직업 군인(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어 유지하는 데에 많은 비용이 필요하였다.
젠트리
귀족과 자영농 사이의 지주층으로 법률가,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도 포함되었다. 주로 토지를 바탕으로 농촌 사회의 중심 세력을 이루었다.
전제 정치
국가 권력을 개인이 장악하여 민의나 법률에 제약을 받지 않고 실시하는 정치를 말한다.
입헌 군주제
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해 제한을 받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재정 군사 국가 특징
16~18세기 유럽에서는 전쟁이 빈번하였다. 유럽 전 지역에서 전쟁 기간의 비율이 95%를 넘었고, 약 3년에 한 번씩 새로운 전쟁이 벌어졌다. 잦은 전쟁은 유럽 재정・군사 국가들의 군대 규모를 더욱 키웠고, 이들 국가는 세금 징수 등을 통해 늘어난 비용을 마련하였다.
16~18세기 재정・군사 국가들이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다양한 군사 기술이 발전하였다.
중세 말 이후 대포가 사용되면서 돌로 쌓은 높은 성벽은 대포 공격으로 무너질 위험이 있었다. 이에 대포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성채(성과 요새)를 별모양으로 세우는 등 새로운 시설을 도입하였다.
16세기 이후에는 점차 손에 들 수 있는 화승총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화승총은 화약을 채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열로 정렬하여 교대로 돌아가면서 총을 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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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로
신항로 개척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향신료, 비단 등 동방의 상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등은 동방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15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여 동방 상품의 가격이 치솟자 동방과 직접 교역하려는 유럽인들의 욕구가 커졌다. 항해술・조선술 발달, 나침반 사용으로 먼 거리까지 항해할 수 있게 되자 유럽인들은 신항로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신항로 개척에 앞장섰다.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의 서인도 제도에 도착하였다.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가는 동쪽 항로를 개척하였다. 마젤란 일행은 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을 가로질러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다.
아메리카 문명과 아프리카의 변화
유럽인이 침입하기 전 아메리카 대륙에는 아스테카 제국과 잉카 제국이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아메리카의 토착 문명은 신항로 개척 이후 아메리카 곳곳에 유럽인이 몰려들면서 급속히 파괴되었다. 에스파냐의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총으로 무장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각각 아스테카 제국과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은 에스파냐는 원주민을 동원하여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수탈하였다. 또한 사탕수수, 담배 등을 재배하는 대농장을 건설하고 생산물을 유럽에 판매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반면 원주민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유럽인이 옮긴 천연두, 홍역 등의 전염병까지 퍼지면서 원주민의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가 급감하자, 유럽인은 광산 개발과 대농장 경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동원하였다(노예 무역).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노예 무역으로 아프리카는 인구가 줄어들고 남녀 성 비율이 불균형해졌다.
노예 무역의 비극
신항로 개척 당시 유럽에서 설탕의 인기가 높아지자 아메리카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할 노동력이 더욱 필요하였으나 원주민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이에 유럽의 여러 국가가 노예 무역에 뛰어들어 200년이 넘는 기간에 천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을 아메리카에 노예로 끌고 갔다. 노예들은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였다.
유럽의 경제적 변화와 무역의 확대
신항로 개척으로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였다. 대서양 무역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잇는 삼각 무역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감자, 옥수수, 담배 등 아메리카 농작물이 유럽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의 막대한 금과 은이 들어오면서 화폐 가치가 하락하여 물가가 크게 올랐다(가격 혁명). 이로 인해 도시 상공업자들이 큰 이익을 얻으며 성장하였다. 교역망이 확대되고 자본의 규모가 커지면서 식회사가 등장하고 보험 등 금융 제도가 갖추어졌으며, 상공업과 금융업이 획기적으로 발달하였다(상업 혁명).
신항로 개척 이후 포르투갈, 에스파냐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인도 회사를 앞세워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인도의 면직물, 중국의 도자기・비단・차 등을 대량으로 구매하고 많은 양의 은을 지급하였다. 이에 따라 세계적인 교역망이 형성되고, 유럽이 확보한 시장은 훗날 산업 혁명을 이루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주식회사
주식을 발행하여 여러 사람으로부터 자본금을 받아 세워진 회사를 말하며, 동인도 회사가 대표적이다.
동인도 회사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아시아 지역과의 무역을 위해 만든 회사이다.
동인도 회사는 무역뿐만 아니라 군대를 보유하고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권한까지 가졌다.콜럼버스의 날
미국 뉴욕의 한 자치구에서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는 퍼레이드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콜럼버스의 모습이 실린 퍼레이드 차량에 올라타 거리를 행진하였다. 미국은 1492년 탐험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을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원주민 저항의 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것이 150년간 계속된 인종 학살을 일으켰다.”라며, 중남미 사람들에게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2002년 대통령령을 통해 미국과 중남미 일부 나라에서 공휴일로 기념하는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었다.
지난 2021년에는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콜럼버스의 날’을 앞두고 ‘원주민 저항의 날’ 선포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선포한 이 성명은 콜럼버스가 대륙에 도착하기 수천 년 전부터 거주하였던 원주민들이 아메리카 문명에 기여한 점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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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의 성립과 발전
셀주크 튀르크가 무너진 뒤 여러 부족과 나라로 분열된 아시아 지역에서 13세기 말 튀르크 계통의 오스만족이 이들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웠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으로 진출하여 발칸반도 남부를 차지하고, 술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메흐메트 2세 때에는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삼았다(1453).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스탄불로 불렸다.
16세기 초에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여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종교적 지도자인 칼리프의 칭호도 획득하여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술레이만 1세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술레이만 1세는 헝가리를 정복하였으며, 유럽 연합 함대를 무찔러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북아프리카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서 무역을 장악하며 번영하였다.오스만 제국의 통치 정책과 문화
오스만 제국은 넓은 영토를 술탄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과 총독을 보내 간접 통치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이슬람교의 전통에 따라 제국 내 비이슬람교도에게 이슬람교를 강요하지 않고, 즈야(인두세)만 내면 자치적인 공동체를 허용하는 관용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서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할 수 있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혈통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유능한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통치에 이용하였다. 특히 술탄의 친위 부대인 예니체리는 정복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문화는 튀르크 전통을 바탕으로 페르시아, 이슬람, 비잔티움 문화 등이 융합되었다. 튀르크어로 쓰인 역사서와 문학이 발달하였으며, 건축에서는 술탄 아흐메트 사원 등 웅장하고 화려한 이슬람 사원이 건설되었다. 천문학, 수학, 지리학 등 실용적인 학문이 발전하였고, 미술에서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세밀화가 유행하였다.지즈야
비이슬람교도 성인 남자에게 부과하던 인두세이다.
커피 하우스
커피를 팔던 커피 하우스는 16세기에 등장하였다. 커피는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회복하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17세기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밀레트
밀레트는 같은 종교를 바탕으로 한 자치 공동체를 말한다. 오스만 제국은 각 밀레트에 종교뿐만 아니라 관습, 재판, 교육 등 폭넓은 자율권을 부여하였다.
예니체리
오스만 제국에서는 발칸반도의 크리스트교도 청소년을 징발하여 개종시킨 후, 군대나 관료로 충당하였다. 이들은 술탄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고위 관료로 등용되기도 하였다.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어 동서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하였다.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여러 유적을 통해 이스탄불이 번영하였던 모습을 살펴보자.
톱카프 궁전
‘톱’은 대포,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하였던 궁전이다. 현재는 8만여 점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으며,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랜드 바자르
‘바자르’는 지붕이 있는 시장을 뜻한다.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에는 비단, 보석, 카펫, 향신료, 도자기 등 세계 각지의 상품과 상인들로 늘 북적였다. 그랜드 바자르에는 현재도 5천 개가 넘는 상점이 들어서 있다.
술탄 아흐메트 사원
술탄 아흐메트 1세의 명령으로 세워졌다. 내부가 푸른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서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린다. 여섯 개의 첨탑은 술탄의 권력을 상징한다. 오스만 건축 양식과 비잔티움 양식이 잘 어우러져 있다.
케밥
얇게 썬 양고기, 쇠고기, 닭고기 등을 긴 꼬치에 꿰어서 숯불에 구워 낸 요리로, 튀르키예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피데
납작한 모양의 발효된 빵으로, 그 위에 다진 고기나 치즈를 올려 먹는 튀르키예의 전통적인 음식이다.